영화 《오디세이》에 담긴 기독교적 서사와 문화에 대한 성경적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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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무 목사(에하드하우스 책임목사)
문화는 공기와 같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문화는 언제나 인간과 함께해 왔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문화 안에서 문화를 접하고 누리며 살아간다. 유명한 연예인이나 예술가만 문화를 만드는 것도,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만 문화를 누리는 것도 아니다.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수도사에게도 그만의 생활방식과 언어, 옷차림과 식사, 기도와 노동의 문화가 있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문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문화를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무엇을 거룩한 문화라고 하고, 무엇을 세속적인 문화라고 해야 하는가?
스타일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보라
문화에는 겉으로 표현되는 양식, 곧 스타일(style)이 있고 그 양식을 통해 전달되는 의미(meaning)가 있다. 시대마다 새로운 스타일이 등장한다. 음악만 보더라도 록 안에 소프트 록, 하드 록, 블루스 록, 포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얼터너티브 록, 사이키델릭 록 등이 있다. 이 밖에도 트로트와 컨트리, 샹송, 재즈, 팝, 시티팝, 헤비메탈 등 셀 수 없이 많은 장르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러한 음악을 크게 대중음악과 클래식으로 구분한다. 클래식은 원본 악보가 중심이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이나 헨델의 《메시아》는 지휘자와 연주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생기지만, 기본적으로 동일한 악보에 근거한 작품이다. 반면 비틀스의 노래는 누가 부르느냐, 어떤 음색으로 노래하느냐, 악기를 어떻게 편성하고 편곡하며 녹음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악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곧 선악이나 고급과 저급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클래식은 고급스럽고 대중음악은 그보다 저급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과연 그것이 성경적인 판단인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라고 노래한다. 이탈리아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는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라고 노래한다. 하나는 대중가요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가곡이지만, 두 노래 모두 떠나간 사람과 그리운 장소를 노래한다. 이것을 두고 어느 것은 선하고 어느 것은 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은상이 작사하고 현제명이 작곡한 〈그 집 앞〉은 이렇게 노래한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도 비 오는 날 사랑하는 이의 집 앞을 찾아간 사람의 마음을 노래한다.
“처음엔 그냥 걸었어. 비도 오고 해서.
오랜만에 빗속을 걸으니 옛 생각도 나네.
정말이야, 거짓말이 아냐. 미안해.
너의 집 앞이야. 난 너를 사랑해.”
표현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두 노래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집 앞에 서게 된 한 인간의 그리움을 담고 있다. 이것만 가지고 하나는 고급스럽고 다른 하나는 저급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가르는 근본적인 기준은 클래식이냐 대중음악이냐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겼는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사랑하게 하며 사람을 어디로 이끄는지가 중요하다. 가사와 주제뿐 아니라 몸짓과 이미지, 이야기와 분위기를 통해 전달되는 의미와 세계관 전체를 살펴야 한다.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도 단순히 그 표현의 물리적인 형태 때문이 아니다. 그 안에 음란과 폭력, 파괴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런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록이나 트로트, 기타나 오르간, 빠른 박자나 느린 박자 같은 스타일 자체에는 선악이 없다. 스타일은 의미를 담는 그릇이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소중한 문화의 영역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1990년대에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라는 책이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의 저자는 대중문화 전체를 무조건 사탄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중문화 속에 확산되고 있던 음란과 폭력, 반성경적 가치관과 영적 위험성을 지적하며 교회가 경각심을 갖도록 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당시 한국 교회에 상당히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음악을 바라보는 기준에는 문제가 있었다. 저자는 클래식 음악에 기반한 전통적인 찬송가 양식을 거룩한 것으로 평가한 반면, 기타와 신디사이저, 드럼을 사용하는 CCM이나 컨템포러리 워십의 음악 양식은 세속적인 것으로 보았다. 음악 안에 담긴 가사와 메시지,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보다 음악의 장르와 악기 편성 자체에 거룩함과 세속성의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단순한 이론에 그치지 않았다. 저자의 강의를 들은 뒤 교회에서는 기타와 신디사이저, 드럼으로 예배를 인도하던 찬양팀을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찬송가 양식은 거룩하고 현대적인 음악 형식은 세속적이라는 판단이 실제 목회와 예배 현장에 적용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중하게 질문해야 한다. 오르간은 거룩하고 드럼은 세속적인가? 클래식에 기반한 화성과 리듬은 하나님의 것이고, 현대 대중음악의 리듬과 악기는 사탄의 것인가? 어떤 악기와 음악 형식을 사용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으며, 누구를 높이고 무엇을 사랑하게 하며,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느냐가 아닌가?
전통적인 찬송가와 현대적인 CCM은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가 사용하는 음악적 언어이다. 전통 찬송가에는 오랜 세월 교회의 신앙을 지켜 온 깊은 신학과 영적 유산이 담겨 있다. 그것은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음 세대가 사용하는 음악적 언어 자체를 세속적이거나 사탄적인 것으로 규정해서도 안 된다.
문화의 스타일 자체에 거룩과 세속의 딱지를 붙여 다음 세대의 언어를 모두 교회 밖으로 밀어낸다면, 교회는 결국 그들과 소통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를 잃어버릴 수 있다. 전통 찬송가의 영적 유산을 소중히 보존하는 것과 현대적인 음악의 형식 안에 복음의 진리를 담는 것은 서로 대립하는 일이 아니다. 복음의 내용은 지키되, 그것을 담아 전달하는 문화적 그릇은 시대와 대상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구자억 목사의 〈참말이여〉는 전라도 사투리와 트로트라는 문화적 형식 안에 성육신과 대속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담는다.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겄는디
하나님 인간이 되셔 이 땅에 오셨다고.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겄는디
하나님 날 위해서 대신 죽어 주셨다고.”
어떤 사람은 전라도 사투리와 트로트풍의 표현이 경박하게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느낌을 완전히 지우기는 어렵다. 이 곡이 모든 예배 상황에 적합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언제나 엄숙한 회중예배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예배하는 시간도 있고, 먹고 마시며 쉬고 웃고 즐기는 시간도 있다.
전도서는 해 아래 인간 삶의 허무와 한계를 누구보다 정직하게 직시한다. 그런데 바로 그 전도서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알았어요, 사는 동안 기뻐하며 즐기는 것 말고는 사람에게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요. 또한 사람마다 먹고 마시며 온갖 수고 가운데 보람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지요.”(전도서 3장 12–13절, 새한글성경)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전도서 8장 15절)
전도와 축제, 교제의 자리에서 트로트의 형식으로 복음을 노래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을 누리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 자리에 믿지 않는 사람이 함께했다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가사에 충격을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외형을 보지 말고 작품이 담고 있는 세계관을 분별하라
문화의 스타일 자체에 선악이 없다고 해서 모든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문화의 외형을 넘어 그 안에 어떤 영적 의미와 세계관이 담겨 있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영화 《파묘》는 어둠의 세계와 귀신들의 힘을 매우 사실적이고 강력하게 묘사한다. 사람들은 스크린에 등장하는 어둠의 영들과 그 실재에 압도된다. 반면 유해진이 맡은 장의사는 교회 장로로 등장하지만, 전화가 오자 “나 지금 바빠요. 성경 공부하고 심방 가야 돼요”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바로 고스톱을 계속한다. 이 영화에서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언어는 희화화되어 저급한 웃음의 소재로 사용된다. 우리는 이런 작품이 어둠의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며 무속적 세계관을 어떤 방식으로 정상화하는지,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거부감을 일으키는지 영적으로 면밀하게 분별해야 한다.
반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도 무당을 연상시키는 복장과 귀신, 결계와 영적 전투가 등장한다. 이 외형만 보고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이 보아서는 안 될 반기독교적인 작품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작품의 외형과 그 안에 담긴 구원의 서사는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전통적인 무당은 귀신을 달래어 인간을 괴롭히지 않도록 하거나, 더 강한 영의 힘을 빌려 다른 영을 제압한다. 그러나 《케데헌》의 주인공들은 귀신을 달래거나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귀신을 몰아내는 사람들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축사를 담당하는 역할에 가깝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죄와 수치가 어떻게 사람을 얽어매는지, 감추어진 진실을 고백하는 일이 어떻게 악의 권세를 무너뜨리는지, 희생적인 사랑이 어떻게 공동체를 회복하고 연합시키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명시적인 기독교 영화는 아니지만, 그 안에는 기독교 복음과 공명하는 중요한 가치들이 담겨 있다.
C. S. 루이스와 J. R. R. 톨킨도 북유럽 신화와 그리스·로마 신화의 소재를 차용하여 기독교적 진리를 표현했다. 루이스는 신화와 문학 안에 인간이 잃어버린 본향과 영원을 향해 품는 깊은 갈망, 곧 젠주흐트(Sehnsucht)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신화적 외형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반기독교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신화적 형식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도 좋은 사례다. 이 작품은 트로이 전쟁의 역사적 배경 위에 호메로스가 수많은 그리스 신화와 신들의 이야기를 더해 만든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영화화했다.
영화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우스의 법’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의 크세니아, 곧 나그네가 찾아왔을 때 먼저 먹이고 재우며 환대하고, 손님도 주인의 호의를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는 질서다. 원전에도 크세니아의 개념은 존재하지만, 놀란은 이것을 하나의 보편적인 ‘제우스의 법’으로 정식화하고 다음과 같은 황금률의 형태로 표현한다.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 말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을 차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장 12절)
얼핏 보면 그리스 철학과 공자의 가르침, 불교, 힌두교를 비롯한 여러 사상에도 이와 비슷해 보이는 말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네가 싫어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예수님의 황금률은 악을 행하지 않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받고 싶은 선을 먼저 적극적으로 행하라고 명령한다. 더구나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고 보답받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도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의 문맥 속에 있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문화와 교육의 영향을 받은 놀란은 원전의 크세니아를 현대 관객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적극적인 황금률의 언어로 재해석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를 통해 제우스의 법을 깨뜨린 일을 후회한다. 그리스군은 거대한 목마를 선물로 남기고 떠나는 것처럼 위장했다. 트로이 사람들이 그것을 선물로 믿고 성 안으로 들이자, 그 안에 숨어 있던 군인들이 나와 성문을 열고 트로이를 멸망시켰다. 선물이 살육의 도구가 되었고, 환대와 신뢰가 침략의 통로가 된 것이다.
서울대학교 교수 두 사람이 이 영화를 평론하면서 미국 백인 프로테스탄트의 서사를 표현한 작품처럼 느껴졌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 동부 해안에 도착한 필그림들은 혹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어려웠다. 첫해 겨울 동안 약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왐파노아그족 원주민들이 이들에게 식량과 옥수수 재배법, 낯선 환경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이주민들은 이듬해 수확을 거둘 수 있었고, 이것이 추수감사절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1621년에는 상호보호조약도 체결했다.
그러나 유럽 정착민의 수가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원주민의 토지관은 유럽인의 배타적인 개인 소유권과 달랐지만, 그들에게도 부족의 영토와 전통적인 경계, 토지 이용권이 있었다. 유럽 정착민들은 이러한 차이를 이용하거나 무시하며 원주민의 땅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처음에는 헐값에 땅을 사들이고, 이후에는 전쟁과 강제이주를 통해 원주민들을 몰아냈다.
정착민의 팽창과 함께 전염병, 전쟁과 학살, 강제이주와 토지 수탈이 이어지면서 수많은 원주민 공동체가 파괴되고 막대한 인구가 희생되었다. 희생자의 숫자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큰 차이가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인구 감소를 최대 1억 명 가까이 추산하는 주장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숫자를 넘어, 스스로 기독교적 건국 정신을 강조해 온 미국의 역사 안에서 자신들을 환대하고 생존을 도왔던 사람들의 땅과 생명을 빼앗은 비극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놀란이 미국 원주민의 역사를 직접 염두에 두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환대받은 사람이 힘을 얻은 뒤 자신을 받아준 사람의 신뢰를 배반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는다는 구조에서 트로이 목마와 미국 정착의 역사는 강하게 겹쳐 보인다. 영화는 그리스 신화의 형식을 사용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황금률을 깨뜨린 서구 기독교 문명의 어두운 과거를 반추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화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다. 신화가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작품 전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분별하고, 그 안에 남아 있는 진리의 파편을 발견하여 성경의 빛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문화를 복음의 기회로 사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9절부터 23절에서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같이 되었으며, 율법 없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과 같이 되었다. 약한 사람에게는 약한 사람과 같이 되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을 전달하는 형식과 언어는 상대에 따라 바꾸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갔다. 복음은 영원하지만 복음이 입는 문화의 옷은 시대와 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진리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 밖에 있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라고 분명히 밝혔다.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과 그 사람의 죄에 동화되는 것은 다르다. 문화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문화의 우상을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다.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과 사탄, 성령과 어둠의 영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한일서 4장 1절)
그러나 음악과 영화, 문학과 미술 같은 문화적 영역에 들어가면 단순히 외형만으로 선악을 나눌 수 없다. 문화에는 겉으로 표현되는 스타일이 있고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있다. 성적이고 폭력적인 표현이 악한 것은 그 안에 음란과 파괴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타와 드럼, 록과 트로트, 애니메이션과 판타지라는 스타일 자체에는 선악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문화적 형식 안에 기독교적 가치와 성경적 진리를 담아야 한다. 그것이 바울이 말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는 것”이며,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문화를 사용하는 길이다.
에베소서 5장 15–16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을 절약하라는 뜻이 아니다. 헬라어 표현에는 주어진 기회를 붙잡아 최대한 활용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때가 악하기 때문에 세상과 문화를 모두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바로 때가 악하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기회를 사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사용하라는 것이다.
음악을 복음의 기회로 사야 한다. 영화를 기회로 사고, 문학과 미술과 새로운 미디어를 기회로 사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화의 언어를 빼앗긴 채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언어에 갇혀서는 안 된다.
좁은 의미의 이원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화를 무조건 세속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세상의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그 안의 영과 의미를 성경으로 분별하고, 악은 거부하며,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취하여 복음의 통로로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문화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수비형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 아래 굳게 서서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공격형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공격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어둠과 거짓이며, 공격의 무기는 정죄가 아니라 진리와 사랑과 복음이다.
복음의 내용은 바꾸지 말라. 그러나 복음을 담을 그릇은 넓혀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어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라. 다양한 문화의 스타일 안에 기독교적 가치를 담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지경을 넓히는 기회로 사용하라.
사탄에게 대중문화를 넘겨주지 말라. 문화의 모든 영역을 다시 복음의 기회로 사라.
